매너

대학교에 처음 올라와서 사촌누나와 서점에 책을 사러 간 적이 있었다.
나는 무심코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누나가 뒤따라 들어오더니 한 소리를 했다.
"야. 이럴 때는 남자가 먼저 들어가서 여자가 들어올 때까지 문을 잡아줘야 하는 거야."
그 때는 '뭔소리야'라는 식으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일년이 지나서 2002년 이성하 교수님의 영어학 개론 시간에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나라 사람들 문화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남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 자기가 문을 먼저 열고 들어간 다음 뒷사람이 오면 문을 잡아주고 기다리는 예절,
아주 기본적인 것이지만 잘 지키지 않아요."

다시 일년이 지나서 입대를 하고 부대에 자대배치를 받았던 날.
무거운 짐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20미터 정도 앞서가던 미군이 뒤따라오는 날 보고,
짧지 않은 시간동안 건물 출입문을 잡아주고 있었다.
아마 그런 것도 문화충격이라면 문화충격이었을 게다.

그 이후로 나는 항상 뒤에 누가 오지 않는지 살피면서 건물에 들어섰다.
매너는 격식있는 사람들이 잘 보이려고 하는 행동 따위 쯤으로 생각했던 나에게는,
일종의 발전이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생각을 통째로 뒤바꿔놓은 일이 얼마 전에 있었다.

사촌형이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병원에는 형제들과 어른들이 계셨다.
막내 숙부님은 이렇게 어려울 때 형제들이 다 모여주니 든든하시다며 일일이 조카들을 챙기셨다.
형들이 담배를 피러 나갈 때도 같이 나가고, 밥을 먹으러 나갈 때도 항상 앞장을 서셨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숙부님은 뒤에 계시다가도 문을 열고 건물을 드나들 때쯤이면,
항상 조카들보다 멀찌감치 앞서 가셔서 문을 열고 기다리고 계셨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손수 문을 열어주시는 모습을 보며,
여태껏 내가 생각했던 '매너'라는 게 무엇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매너'였는데도,
내가 해왔던 것처럼 소개팅에 나가 여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든가,
백번 양보해 나를 따라오던 뒷사람에게 욕먹지 않기 위한 배려였다든가 하는 건 본질이 아니었다.
어쩌면 얼굴도 모르는 수백명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도시인들의 '매너'는,
숙부님이 보여주신 손아래 조카들에게 보여준 매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이차를 떠나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공경의 바탕이지 않았나 싶다.
덕분에 숙부님에 대한 형제들의 공경심은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에 대한 그것만큼이나 두터울 줄로 안다.

p.s. 숙부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두 개만 더.

1. 숙모 얘기를 듣건데, 숙부님은 월급날이 되면 항상 월급 명세서를 구겨지지 않게 조심조심 가져오신단다.
돈이야 통장으로 오차 없이 정확하게 들어오겠지만 월급 명세서는 그렇지 않은가보다.
그 월급 명세서를 숙모님께 두 손으로 공손히 드리면서 하신다는 말씀이,
"지난 한 달동안 고생했고, 고~~마웠습니다. 이번 한 달도 우리 집을 잘~ 꾸려주세요." 란다.
덕분에 숙모님은 막강한 재산권을 손에 쥐고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고 계신다.

2.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도 그랬고, 지금은 홀로 되신 할머니를 뵐 때도 그렇고,
숙부님은 누구보다 나의 조부모님께 깍듯하게 인사를 드렸다.
허리를 숙이는 정도가 아니라 누가 봐도 그 인사에 공경심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만큼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조부모님께야 공손히 절을 올리고 하는 게 나의 도리겠지만,
내가 내 부모님께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숙부님은 당신의 부모님께 인사부터 다르게 하셨다.
숙부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모님이니 자식된 도리로서 공경하게 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는 더욱더 예의를 갖춰야지.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내 부모님을 함부로 대하는 법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고2, 중3밖에 안 된 내 사촌동생들은
숙부님이 오시면 두 손을 공손히 배 앞에 모으고 정수리가 보일 때까지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오늘의 쏭, Sting <Englishman in New York>

by 靜中動 | 2009/02/27 10:13 | monologue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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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지나가다. at 2009/03/09 00:06
난 팀장님과 선배들에게 매너남이 되어야겠다. ㅋ
Commented by 靜中動 at 2009/03/10 10:06
오호..프로페셔널? ㅋ
Commented by at 2009/05/25 00:49
오호...역시 가정교육이 중요해 사연있는 매너남
Commented by 靜中動 at 2009/06/02 17:19
너라도 매너남이라고 불러주니 다행이네. 정만이랑 한나라는 쉬운 남자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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